2천만이여 궐기하라!
침묵을 떨치고 일어서는 핸드폰 소비자들, 사상 초유의 ‘반란’을 조직한다
(사진/핸드폰 인구가 급증하면서 관련 액세서리 업체들도 호황을 맞고 있다.)
국민의 절반이 불만과 불편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정의’이다. 소비자와 공급자의 관계, 시장에 대한 정부의 정책, 소비자와 소비자간의 사회관계를 비롯해 모든 면에서 패러다임의 변화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2천만명의 소비자가 일어선다. 말없이 유보했던 소비자 주권을 찾으려는 물결이 거세다. 온 국민의 절반이 핸드폰을 사용하는 시대. 소비자들은 이제 침묵을 떨쳐버리고자 한다.
과거의 소비자들은 철저하게 분산돼 있었다. 소비자들은 따라서 어느 업체의 서비스가 더 유리한지, 어느 제품이 더 싼지를 알아내는 데 골몰했다. 업체의 일방적인 선전 공세 속에서 머리를 싸매고 ‘알아서 살 길을 찾는’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사이버공간에서 태동한 소비자운동
(사진/한 핸드폰 A/S센터 모습. 핸드폰 소비자들의 불만이 집단 행동으로 옮겨붙을 태세다.)
그러나 2천만명 시대의 소비자는 다르다. 국민의 절반이 불만과 불편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정의’이며 ‘진실’일 수 있다. 소비자와 공급자의 관계, 시장에 대한 정부의 정책, 소비자와 소비자간의 사회관계를 비롯해 모든 면에서 패러다임의 변화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지하니까 안 터지겠지.” “내것은 낡은 모델이니까.” 핸드폰 100만이나 200만 시대의 소비자들 모습은 체념이었다. 혼자 투덜대는 것으로 고작이었다. 핸드폰이 불통돼도 그러려니 했고, 음성사서함을 이용해 부과되는 요금도 한마디 불평없이 납부했다.
그러나 2천만 시대의 소비자는 다르다. 양이 축적되면 질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양질전화의 법칙’을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다. 소비자들은 이미 스스로 각성하고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들은 이제 따져 묻기 시작한다. “핸드폰이 켜졌는데도 불통돼 음성사서함을 이용했다면 서비스업체에도 문제가 있다. 서비스업체도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음성사서함 이용료를 소비자가 모두 부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의하기도 한다. 2천만의 소비자 주권을 찾는 사상 초유의 소비자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핸드폰 소비자운동은 사이버 공간에서부터 태동했다.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등 4대 PC통신이 주요 무대다. 지난 97년 5월 나우누리에 ‘이동통신 사용자 모임’(이사모)이 생긴 이래 하이텔, 천리안, 유니텔 등의 PC통신에 잇따라 소비자단체가 결성됐다. 지난 3월에는 하이텔, 나우누리, 유니텔에서 이동통신 소비자운동을 전개하던 대표들이 모여 ‘이동통신 사용자모임 연합체’(회장 노치영·35)를 발족했다. 5월에는 천리안의 ‘이동통신 사용자 동호회’도 합류했다.
4대 PC통신을 망라한 연합체 참여자들은 현재 3만2천여명에 이른다. 고립분산성을 탈피해 연합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운동의 법칙을 곧바로 실천에 옮긴 것이다. 유니텔 ‘이동통신사용자동호회’의 시솝 신종훈(28)씨는 “막강한 자본력과 정보력을 쥔 대기업과 싸워 승리하려면 확고하게 단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체 회원들은 현재 착신전환 서비스에 대한 요금문제를 놓고 한 통신업체와 싸우고 있다. 다른 업체들은 발신자한테 통화요금을 물리고, 착신전환기능 서비스 신청자한테는 700원∼900원의 월정 금액을 받는다. 그러나 이 업체는 월정 금액이 없는 대신에 발신자와 착신전환 서비스 신청자 양쪽 모두에게 착신전환중의 통화요금을 받고 있다.
연합체는 일단 이 업체에 시정을 요구하는 공문을 발송한 상태다. 하이텔 ‘이사모’의 시솝 노치영(36)씨는 “현재 요금부과 제도로는 소비자들이 이러한 2중 요금부과의 실상조차 알 수 없는 게 문제”라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PC통신 게시판을 통한 홍보전, 서명운동 등의 후속행동을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소보원 민원 1위로 떠오른 핸드폰
핸드폰 소비자운동은 사이버 공간뿐 아니라 종종 ‘장외 투쟁’으로도 발전한다. 연합체는 YMCA 등 시민·사회단체들과 연대운동을 시작했다. 지난 4월 하이텔 ‘이사모’와 YMCA는 공동으로 한 업체 단말기의 진동기능이 부실함을 조사해 제시하고 시정조처를 이끌어냈다. YMCA 시민중계실의 김종남 간사는 “기업을 상대로 투쟁하는 전략전술은 일반 소비자단체들이 노하우 우위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집단적 행동은 핸드폰의 대량 보급과 함께 소비자들의 불만이 폭증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소비자보호원에 따르면 올 들어 9월13일까지 핸드폰 관련 민원은 9395건으로, 건강식품(6993), 가옥임대차(6911), 유아용 교재(4578) 등을 훨씬 앞지르고 있다. 소보원 관계자는 “올해 초부터 핸드폰 관련 민원이 건강보조식품 등 전통적 상품에 대한 것을 제치고 단연 1위로 떠올랐다”며 “핸드폰 문제는 소비자 권익운동의 최대 영역”이라고 말했다.
정보통신부의 ‘통신서비스 이용자 피해신고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난 97년 11월에는 피해신고 건수가 하루에 2건에 그쳤으나, 올해 상반기에는 하루 평균 14.6건으로 증가했다. 신고 건수도 올해는 총 2004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890건에 비해 2.25배나 늘었다. 이 가운데 이동전화 사업자에 대한 민원이 1476건으로 전체의 73.6%를 차지했다. 정통부 관계자는 “업체들이 가입자수를 늘리는 데만 골몰해 기존 가입자의 편의를 소홀히 하다보니 민원이 격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운동가들은 투쟁의 초기부터 빛나는 승리의 성과들을 전취했다. 지난해 5월 나우누리와 하이텔의 ‘이사모’는 한 단말기 제조업체에 공동으로 불량 PCS폰 교체를 요구했다. 통화감이 좋지 않고, 통화중에 잘 끊어진다는 회원들의 불만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회사쪽은 ‘이사모’ 회원들한테만 PCS폰을 교체해주겠다고 제의했다. 정씨는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소비자한테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라며 “회원들한테만 혜택이 돌아가는 제안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단말기업체는 결국 불량 단말기를 전부 A/S하기로 약속했고, 같은 문제가 2차례 발생하면 단말기를 교체하기로 합의했다. 운동에 참여한 선도적 소수를 ‘매수’하려는 시도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운동의 도덕성을 수호한 것이다.
YMCA와 공동으로 벌였던 핸드폰의 진동기능 조사도 성공사례다. 이들은 한 업체의 단말기가 진동이 약해 주머니에 넣고 있어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공문 발송과 PC통신 게시판을 통한 홍보전을 거듭 펼친 결과 회사쪽은 “새 제품부터 진동의 세기를 벨소리처럼 상·중·하로 구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모든 운동분야의 활동가들이 겪는 것처럼 핸드폰 소비자운동의 ‘전사’들도 저항과 시련의 벽을 넘고 또 넘어야 했다. 대부분의 업체들은 일단 운동가들을 상대해주려 하지 않았다. 자료를 요청하면 “우리는 상관없다. 문제가 있으면 정통부나 소보원에 고발하라”며 전화를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서비스 개선을 위한 모니터링을 하겠다고 업체쪽에 알렸습니다. 전화를 걸면 담당자가 없다며 연락처를 남기라고 하고, 통신으로 알리니 ‘수신거부’라고 보내왔죠. 두달이 돼도 연락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소비자를 소비자로 보지 않습니다.”
운동을 주도한 한 시솝은 하루에 5천통의 ‘쓰레기 메일’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생업인 소속 직장의 업무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동전화업체 직원이 ‘보복’ 목적으로 이메일 조준폭격을 한 것이다.
'요금인하 촉구' 대중적 서명운동
운동 일선에 나섰던 한 회원은 타깃으로 설정하고 있던 업체 간부로부터 전화를 받기도 했다. “마음만 먹으면 당신을 그 회사에서 내쫓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핸드폰 소비자운동가들은 시민·사회단체의 전업적 활동가와 달리 생업이 있는 20∼30대 직장인들이다. 이들에게 밥줄을 끊어놓겠다는 이야기는 엄청난 위협이다. 이 회원은 “두려웠다. 나는 학생 때 데모 한번 안 해봤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통신 게시판에 올라오는 수천통의 지지서명 물결을 보면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핸드폰 소비자운동의 이슈도 빠른 속도로 바뀌어나가고 있다. 핸드폰 관련 기술이 급속히 진보하고 있는 만큼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핸드폰이 잘 터지느냐, 안 터지느냐를 둘러싼 단말기 문제가 초기 이슈였다면, 의무보증제도 등의 약관 관련 문제들이 터져나왔고 최근에는 통화품질 등 서비스 질 문제로 옮겨가고 있다.
‘연합체’와 YMCA 등의 활동가들은 최근 핸드폰 소비자운동의 획을 그을 중대한 이슈를 토론했다. “핸드폰 2천만명 시대가 됐는데도 통화요금은 100만, 200만명 시대의 수준에서 바뀌지 않고 있다. 2천만명 시대와 100만∼200만명 시대의 원가가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시장의 질서와 법칙이 왜 변화하지 않는 것인가. 이제 핸드폰 소비자운동은 종전까지의 소소한 불만처리 요구를 탈피해 2천만명의 보편적 권익을 대변하는 요금인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할 때다.”
이에 따라 이들은 추석 연휴가 끝나는 대로 4개 통신업체의 동호회망을 통해 요금인하를 촉구하는 대중적 서명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들은 또 인터넷상에 별도의 웹사이트를 개설해 서명공간을 넓힌다는 방침이다. YMCA 등은 장외 투쟁을 담당하는 등 역할 분담 문제를 검토중이다. 정윤석씨는 “현재 발기취지문을 작성하기 위해 업체별 원가구조, 시장 상황, 정통부 요금관리 정책의 문제점 등에 관한 자료를 조사중”이라고 말했다.
핸드폰 소비자운동이 다른 사회운동과 달리 사이버 공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점도 흥미롭다. 비밀의 열쇠는 바로 핸드폰 세대가 PC통신과 인터넷 세대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현재 국내 핸드폰 가입자의 70%는 20∼30대 젊은층이다. 신세기통신의 경우 20대가 41.3%, 30대가 28.3%이며, 올 상반기 한국통신프리텔의 신규 가입자도 20대가 40%, 30대가 27%를 차지했다.
인터넷 세대, 핸드폰 세대와 정확히 일치
전면에 나선 활동가들은 그래서 자신들의 운동을 두고 “신세대가 앞장서서 신세대 방식으로 권익침해에 맞서는 새로운 스타일의 사회운동”이라고 말한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신세대 젊은 네티즌들이 선두에 서서 운동을 이끌고 있는 점을 눈여겨봐달라는 것이다.
관찰자들은 그런 까닭에 운동의 향배에 민감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2천만명의 잠재적 동조자를 조직하는 데 성공한다면 미국의 랠프 네이더와 같은 소비자운동의 위대한 영웅들이 탄생할 수도 있다. 시대정신의 새로운 주역이 떠오를지 여부가 궁금하다.
황상철 기자
rosebud@ma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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