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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호 대북사업가② “복지로 교류하고 싶어요”

 

노정호 대북사업가② “복지로 교류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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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호 한국노년복지연합 사무총장.
RFA PHOTO

MC: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북교류와 사람들> 시간입니다. 진행에 노재완입니다. 남북관계가 좋았던 2000년대 중반엔 가정의 달인 5월만 되면 가족 여행 차원에서 금강산과 개성을 찾는 남쪽 관광객이 참 많았는데요. 이젠 추억의 옛이야기가 돼 버렸습니다.

개성관광은 불교 신도들의 개성 영통사 성지순례를 통해 처음 소개됐는데요. 그 당시 성지순례 사업을 주도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노정호 전 씨피코국제교역 사장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노 전 사장의 나진선봉경제자유지대 진출 얘기를 들어봤는데요. 오늘은 건강식품 판매사업 진출과 영통사 성지순례 사업을 하게 된 사연을 알아봅니다.

노정호: 나진선봉지구에서 실패한 후 저는 곧바로 교역에 손을 댔습니다. 나진선봉지구에서 잃은 50만 달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시작한 겁니다.

기자: 교역은 어떤 것을 했나요?

노정호: 주로 건강식품을 들여왔습니다. 여러 가지 정력제도 가져왔고요.

기자: 그래서 돈을 좀 버셨나요?

노정호: 그럼요. 각종 약재를 갖고 와서 국내에서 제품도 만들었는데요. 당시 홈쇼핑이 대단히 인기를 끌 때였는데 제가 직접 텔레비전 홈쇼핑에 출연해 제품들을 팔기도 했습니다. 제가 못해도 30~40회 이상 출연했을 겁니다. 텔레비전에선 북한 최고위층들이 먹는 강장제라고 광고를 했죠. 이외에도 분유, 설탕 등 생필품을 북한에 반출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북한 주민 일손 주기운동’도 펼쳤습니다.

기자: 북한 주민 일손주기운동은 뭡니까?

노정호: ‘북한 주민 일손 주기운동’은 남한에서 보낸 폐지와 헌옷 등을 갖고 북한 주민들이 관련 제품을 만드는 거였습니다. 예를 들어 헌옷은 밀대 같은 청소 도구를 만든다거나 헌옷을 잘라서 각종 트리를 만들었습니다.

기자: 그러니까 남한에서 원자재를 주고 북한에서 제품을 만들어 가져온 거네요?

노정호: 그렇죠. 또 폐지를 이용해선 찻잔 받침대와 지공예품도 만들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주민들에게 물품 지원 등 직접 도와주는 것보다 일감을 주고 스스로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남북 당국이 합의해서 추진하는 대규모 교류의 경우 북한 군부나 북한 당국에 돈이 들어갈 가능성이 있지만, 주민들에게 일거리를 주는 것은 실질적으로 주민들에게 돈이 들어가는 간다는 점에서 좋은 사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손주기 운동과 임가공사업은 당시 한국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가 됐습니다.

기자: 그러면 개성 영통사 성지순례 사업은 어떻게 해서 하시게 된 건가요?

노정호: 성지순례를 하기에 앞서 영통사 사찰에 대한 복원 사업이 있었죠. 복원이 끝난 다음에도 여러 명목으로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복원 사업에 돈을 낸 신도들이 영통사를 방문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천태종 스님에게 신도들을 매일 500명씩 보내자고 했죠. 그러자 스님이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저한테 물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처음 나진선봉지구에 진출할 때도 사람들의 왕래를 통해 교류를 활성화하려고 했던 게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나진선봉의 경우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개성은 바로 코앞이잖아요. 얼마나 좋습니까. DMZ를 통과해서 씽씽 달린다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더구나 당시 개성공단이 막 조성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개성 시내도 못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북한 관계자들과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업 합의까지 이끌어냈죠.

기자: 영통사 성지순례가 나중에 중단된 이유는 뭡니까?

노정호: 영통사 성지순례는 문화교류 차원에서 여러 달 진행됐는데요. 그 무렵 현대아산에서 개성관광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업에 앞서 통일부에서 사업 승인을 받아야 하잖아요. 당시 통일부는 저희가 매일 500명씩 가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관광 대가로 북한에 1인당 50달러를 지급했는데 통일부는 문화교류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갈 필요가 있느냐는 거였습니다. 그러면서 한 달에 한 번만 보내라고 하는 거예요. 솔직히 그것은 말이 안 되죠. 천태종 신도 수가 30만 명 정도인데, 매일 500명씩 가도 몇 년이 걸립니다. 그래서 그런 점을 설명했지만, 통일부는 완고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만 가라.” 계속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일단 정식사업에 앞서 시범사업으로 한 달에 4번 가겠다고 하고 시작했습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개성 시내는 개방되지 않았을 때였으니까 인근에 대공포라든지 군사 시설들이 많았겠죠. 그러나 우리 시찰단이 개성 시내를 지나가다 보니까 거기에 있던 군사 시설들이 하나둘씩 사라진 겁니다. 그때 당시 개성을 가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정부가 계속 개성 방문을 제한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민 끝에 기자들을 태우고 마지막으로 개성을 방문했습니다. 영통사에서 제가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남북 간의 교류가 정치적 입장에서 이렇게 제약을 받는다는 게 정말 이해할 수 없고, 이러한 불합리성이 심각한 문제다.” 그러고 나서 그 자리에서 중단 선언을 했습니다.

기자: 그랬군요. 결국, 총장님이 먼저 그만하겠다고 얘기한 거네요.

노정호: 네, 그렇죠. 당시 북한에서도 깜짝 놀랐을 겁니다. 저희가 먼저 중단 선언을 했으니까요.

기자: 끝으로 만약에 남북관계가 개선돼서 북한에 진출할 기회가 생기면 또다시 대북사업을 하실 의향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노정호: 저는 대북사업 자체보다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노인복지 사업을 갖고 고령화와 관련한 정책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복지는 아주 간단한 겁니다. 행복한 삶을 뜻하는 복지는 단순히 수혜, 즉 혜택만을 주는 게 아니라 감동을 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 간의 교류도 이러한 부분에서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북한 주민들도 복지의 대상이 돼야 합니다. 그리고 감동 복지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기가 언젠가 올 거라 믿고 저는 복지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기자: 결국 남북 간에도 복지교류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시네요. 네 잘 알겠습니다.

‘남북교류와 사람들’, 지금까지 노정호 전 씨피코국제교역 사장과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총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노정호: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