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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호 대북사업가① 나진선봉지구 진출과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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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호 대북사업가① 나진선봉지구 진출과 실패

원문바로가기 : 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b0a8bd81ad50b958c640-c0acb78cb4e4/fe-nj-05152013113002.html

서울-노재완 nohjw@rfa.org
201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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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호 한국노년복지연합 사무총장.
RFA PHOTO

MC: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북교류와 사람들> 시간입니다. 진행에 노재완입니다. 금강산관광지구에 이어 최근 개성공업지구까지.. 남북 당국간의 대립으로 남북경제협력의 상징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투자 규모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지만, 1990년대에도 남북교역을 통해 북한에 진출한 남한의 사업가들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만나게 될 주인공은 1994년부터 2006년까지 대북사업을 했던 노정호 전 씨피코국제교역 사장입니다. 오늘과 다음 주 이 시간 두 차례에 걸쳐 노 전 사장의 파란만장한 대북사업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은 먼저 나진선봉경제자유무역지대에 진출한 사연을 알아봅니다.

기자: 안녕하세요.

노정호: 네, 안녕하세요.

기자: 대북사업을 그만두고 요즘엔 노인복지를 위해 일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노정호: 네, 현재 한국노년복지연합(약칭 한노연)에서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기자: 1990년대 한국 기업인으로는 최초로 나진선봉지구에 투자했습니다. 나진선봉지구는 어떻게 해서 들어가게 됐나요?

노정호: 90년대 초에 나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에 대외경제협력법이 만들어졌고, 외국인 특례법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이 지역이 북한 개혁개방의 신호탄으로 알려지게 됐죠. 저는 90년부터 93년까지 홍콩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조선족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창구 역할을 하던 시기인데요. 제가 그때 조선족들과 함께 실무업무를 했습니다. 미수교 국가와 관련해서 왕래, 교류가 대단히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한중 수교가 되면서 이젠 남은 것은 북한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당시 북한의 파트너가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였는데요. 북한이 개방하게 되면 한국도 포함되는 거냐 제가 물었죠. 자유경제무역지대니까 안 될 게 없잖아요. 기왕 진출하는 거라면 오피스텔을 짓고 싶다고 했죠. 생각해보니까 수익성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기자: 나진선봉지구에 진출해서 철조망을 공급하고 설치하는 작업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왜 철조망을 설치해달라고 했나요?

노정호: 당시 계약은 북한의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와 중국 연변의 용흥집단공사, 그리고 제가 함께 합영 형태로 오피스텔 건립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용흥집단공사는 건설을 맡고, 저는 땅을 대고, 북한 측은 건설에 필요한 인력을 대기로 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나진선봉 역전동 내 토지 3만㎡를 50년간 임대하고 오피스텔을 지어 외국기업에 분양하고 여기서 생긴 이익금을 일정 비율로 나눠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50만 달러 상당의 토지 사용권을 철조망을 공급하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북한은 나진선봉지구를 본격 개방하려면 이 지역을 북한 주민들과 격리하는 게 우선이라는 논리로, 철조망으로 둘러싸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죠. 어차피 북한에 지불해야 할 돈인데, 그 돈으로 남한에서 철조망을 제작해서 공급하겠다.. 나진선봉지구는 경기도의 절반 크기였습니다. 중국의 심천처럼 개혁, 개방만 하면 외국인들이 몰려들 것이며, 당연히 돈도 벌 거라고 생각했죠.

기자: 그러면 그당시 설치한 철조망 총 길이는 어느 정도 됐나요?

노정호: 전체 철조망 길이가 80km 정도였는데요. 제가 그 중 절반인 40km를 맡았습니다. 1995년 1월 6일에 인천항을 통해 처음 철조망을 보냈습니다.

기자: 결국 오피스텔 건립 사업을 포기하고 철수했으니까 철조망 설치비 50만 달러만 잃은 거네요?

노정호: 사실 북한도 개방에 대한 의지가 강했습니다. 개방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고 나진선봉을 자유경제무역지대로 만든 건데요. 그때 제가 토지 50년 사용권을 갖는 데 있어 조건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은 계약 시점으로 2년 안에 기초공사를 끝마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반 시설이 없는 상황에서 2년 안에 기초공사를 한다는 게 솔직히 무리였습니다. 건설 공사를 맡은 중국의 용흥집단공사가 기초공사를 끝내지 못한 채 2년이 지나자 제가 갖고 있던 토지 사용권도 자동으로 무효가 됐습니다. 결론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에서도 봉변을 당했는데요. 제가 북한에 철조망을 공급한다고 해서 한국 언론에서 크게 보도가 되니까 보수단체와 실향민들이 정동에 있는 저의 사무실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그랬습니다. 북한의 철조망을 벗겨야 하는데, 철조망을 치는 일을 했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그랬죠. “그 철조망은 분단을 상징하는 철조망과는 다르다. 북한이 철조망을 통해 주민과 차단하고 일부분을 개방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죠.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철조망 설치로 인해 그런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습니다.

‘남북교류와 사람들’ 오늘은 노정호 전 씨피코국제교역 사장을 만나 나진선봉지구에 진출했던 사연과 실패 원인을 들어봤습니다. 노 전 사장은 북한에 투자를 하는 데 있어 실질적으로 어떤 절차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몰라 이 같은 피해를 봤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노정호 전 사장의 두 번째 대북사업 이야기. 건강식품 판매사업 진출과 개성 영통사 성지순례 사업을 추진하게 된 사연을 전해드리겠습니다.